소설

책 읽어주는 남자(Der Vorleser) 후기

겨울오렌지 2025. 2. 2. 17:18

 

 

잡소리인데, 이 책이랑 영화 블라인드랑 묘하게 헷갈렸다. 둘 다 아직 안 본 작품이었는데, 뭔가 비슷하다는 인상을 줌. 이번에 이 책 읽었으니 더 이상 헷갈릴 일은 없겠다. (검색해 보니 블라인드는 동화 '눈의 여왕' 을 모티브로 만들었다고 한다).
 
책 읽기 전에 인상으로는 나이차 나는 부적절한 관계가 파멸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. 영화 포스터와 줄거리를 대충이나마 본 적이 있어서 그런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. 다 보고 나니 주인공들의 부적절한 관계보단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, 독일인들의 태도나 인식에 대해 보여주는 것에 좀 더 초점을 맞춘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다. 읽기전에는 전혀 몰랐어서,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이 전후 독일이었다는 것과 주인공들이 독일인들인데 나치 집권기를 바라보는 서술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신선했다. 사실 가해국의 시선에서 바라보다 보면 좀 아슬아슬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는데, 읽는데 크게 불편한 부분은 못 느꼈다. 주인공들에 대한 연민은 좀 들었지만,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처지에 불만이 생겼냐 하면 그것도 아님. 작가님이 독일 사람인데 굉장히 적절하게 잘 써주셨단 생각이 들었다. 주인공들의 혼란스러운 감정은 이해가 가면서도 나치에 대한 혐오감은 사라지지 않게 서술해 주셨다.


 

결말에 대한 스포주의!

 
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뭐였냐면, 한나의 재판 장면이었다. 한나는 재판 중에 몇 번이고 '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?' 를 재판장에게 묻는데, 자신의 어쩔 수 없음을 항변하기 위해 비꼬듯이 묻는 게 아니라 정말 몰라서 묻는 게 느껴졌다. 한나가 저지른 짓들은 용서받을 수 있는 게 아니지만, 그게 당연하던 시대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했던 거라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. 이렇게 적고 보니, 편드는 것 같은데 편드는 건 절대 아니고,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는 생각...
 
한나가 문맹이란 건 일찌감치 눈치챘는데, 베르크가 보내준 녹음테이프를 계기로 글씨를 배워 강제수용소에 대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는 부분에선 잠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. 그전까지는 한나가 자신이 저지른 중죄를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다가 과거를 본격적으로 직시한 부분이라 생각됐다. 한나가 자살한 부분에 있어서는 물론 베르크의 바뀐 태도도 있었겠지만, 그보다는 과거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 더 크게 다가왔을 것 같다. 내가 감시하던 사람들, 그리고 나에게 책을 읽어주던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는데 일조한 거잖아. 한나가 그걸 모르고 하진 않았을 것 같지만, 남들도 다 하고, 당연하게 여기던 시대에 느끼는 감정과 모든 게 끝나고 되돌아볼 때의 감정이 다른 순간이 있지 않을까.
 
한나가 자살한 이유에 대해서는 4번처럼 생각하긴 했지만, 사실 너무 복잡한 감정이라 내가 생각하는 것 외에 무언가가 더 있을 것 같긴 하다. 베르크와의 만남도 이유 중 하나였을 것 같은데, 이들의 사랑이 내가 이해하기에는 다른 것들보다 더 어려웠다. 솔직히 말해서 한나가 십 대 소년을 유혹한 거에 대한 이해는 잘 되지 않는다. 도대체 무슨 마음이었지...? 이들이 아련하긴 한데, 음 그냥 가스라이팅 당한 관계 같아 보였고. 베르크가 범죄자를 사랑한 까닭에서 얻는 죄책감을 보이지만, 그걸 동등한 사랑이라 볼 수 있나 싶어 엄청 몰입되진 않았다. 한나와의 관계에서만 보면 베르크는 그냥 피해자 같은데..? 이들의 관계를 생각하다 보면 한나는 도대체 왜 길 가던 십 대 소년을 유혹했나,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고...
 
한나가 왜 문맹인 자신을 끝까지 숨겼는지도 살짝 궁금했다. 남들 앞에 내세우기 부끄럽다는 건 알겠는데, 재판장에서까지 숨겨야 할 이유가 더 있지 않을까? 소설에선 크게 언급되지 않아서 괜히 더 생각해 보게 된다.
 
마지막에 유일한 생존자였던 딸이 주인공들의 관계를 비판하듯 보고, 한나의 죄를 사면해 줄 수도, 사면해주고 싶지도 않다는 뜻을 보여줘서 좋았다. 어쭙잖은 이해 장면이 들어갔다면 이 소설을 지금과 같은 시선으로 보기 힘들었을 것 같다. 영화도 잘 만들었다고 해서 조만간 함 보려고. 보다 보면 눈물 흘릴 것 같으니 어디 안 가는 주말에 한 번 봐야지.